주목이나 카우리나무처럼, 우리의 역사에도 띄어난 인물 중에 당대의 삶은 짧았으나 사후에 갈수록 그 명성이 인구에 회자되고 만세에 그 이름이 길이 빛나는 영웅호걸들이 많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치우천황(자오지한웅), 을지문덕(우루치문디기), 연개소문(연나갓쉰동), 김유신, 흑지상지, 고선지, 이순신 등을 최고의 호걸로 생각하며, 다른 영웅호걸들은 차차 소개하기로 하고, 흥무대왕 큰큰소뿔한(太大角干) 김유신 호태 대장군을 먼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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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태대각간순충장렬개국공흥무대왕 김유신 영정
(길상사흥무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
김유신은 패망한 가야왕국의 후손으로 수많은 견제와 난관을 극복하고 살아서는 삼한일통의 원훈으로 태대각간으로 부귀와 권세를 누리다 와석종신했고, 죽어서는 신하의 몸으로 우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18세에 화랑의 총사령관인 15세 풍월주가 되었으나 몰락한 가야계의 후손으로 이후 줄곧 신라의 핵심귀족사회로부터 비토 되어 심한 견제를 받다가 50세에 이르러 상장군을 단 후 66세에 상대등, 만년 74세에 태대각간에 올랐으니 장군이야말로 대기만성의 전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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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의 증조부 구형왕릉(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532년 졸지에 신라를 뺏기고 돌아가신 비운의 조부 구형왕을 추모하며. |
크고 작은 30여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전략가로서 멸사보국해 가정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했고,
662년 평양성 군량수송 작전 때는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맨 선봉에 서서 견마지로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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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 장군 사대비(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김유신 장군이 5년여 간이나 증조부 구형왕의 묘를 돌보며
때때로 활쏘기를 했던 곳. |
673년 7월 1일 임종전 문무왕이 문병차 장군의 사가로 행차했을 때 김유신 장군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신이 온 힘을 다해 원수(元首)를 모시려 했으나 견마(犬馬)의 몸에 병이 들어 오늘 이후로 다시는 용안을 뵙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문무왕이 장군의 두 손을 꼭 잡고 울면서 말하길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 물이 있는 것과 같소.
만일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은 어떻게 하고 사직은 또 어떻게 하리까” 하니 이에 장군이 마지막 유훈을 문무왕에게 내리고 임종하시니 죽는 순간까지도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안녕을 갈구한 장군이야말로 죽어서도 3000년을 이 강토를 굽어보시리라.
- 다음 편에 계속(to be continued) -
讚. 김유신가
박만호 著
살아서는 영일없이 전장에서 견마의 로(勞)를 다했고
죽어서도 삼천년을 이 강토를 굽어 살펴 수호하시니
아! 원훈(元勳)의 드높은 공은 천추에 길이 빛나리라
<제2편> 패망한 가야국의 후예
삼국통일을 운운할 때 그 주역으로서 우리는 흔히 태종무열왕 김춘추, 문무왕 깁법민, 그리고 태대각간 김유신을 이야기 한다.
▲ 태종무열왕 김춘추, 문무대왕 김법민, 태대각간 김유신 비 (남산동 통일전)
우선 김유신 장군의 가계도를 살펴보자.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은 김유신 장군의 12대 조부가 된다.
김유신 장군의 12대 조모가 되시는 허황옥 왕후는 원래 인도의 아유타국(지금의 아요디야 지방)의 공주로서 16세때 서기 48년(김수로왕 7년) 7월 27일 25,000리 머나먼 항해 끝에 지금의 김해시 망산도(主浦村)에 도착하여 김수로왕과 로맨틱한 국제결혼식을 올린다.
▲ 김유신의 12대 조부 김수로왕릉 (김해시 서상동)
1439년 정화.
1580년 왕릉수축 상석과 석단 마련.
1878년 능역개축 말 양 법 석수 마련.
▲ 김유신의 12대조모 허황후릉 (김해시 구산동)
허황후는 인도아유타국 공주로 16세때(AD48년) 7월27일 2만5천리
먼 항해 끝에 김해망산도에 도착.
▲ 파사석탑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떠날때 무사항해를 위해 실어 왔으며,
이 탑의 돌가루에 닭벼슬의 피를 떨구어도 응고되지 않았다고 한다.
▲ 허황후의 고향 인도 아요디아의 추억
강가강상류사류강변의 허황후기념비, 아요디아 람카샤공원 내
허황후기념비와 제막식 장면.
김수로왕 이후 가락국 계보는 거등-마품-거질미-이사품-좌지-취희-질지-겸지-구형(구충,구해)으로 이어지는데, 구형왕은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로서 서기 532년(법흥왕 19년) 갑작스런 신라의 침공으로 졸지에 나라를 빼앗기고 양위하면서, 패망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비운의 왕으로서 지금의 경남 산청군에 있는 태왕궁에서 5년간 은거하며 울분을 달래다 쓸쓸히 붕어하셨다.
구형왕이 돌아가실 때 “내 무덤을 모조리 돌로 덮어 달라” 하셨는데 이는 망국의 왕으로 통한의 가슴을 짓누르고자 하는 단장의 유조였으리라 짐작된다.
▲ 돌 덮인 구형왕릉 (산청군 금서면)
장군의 증조부 구형왕은 532년(법흥왕19) 신라에 양위 후 이곳
태왕궁에서 은거하다 5년후 쓸쓸히 돌아가셨다.
훗날 서기 595년(진평왕 17년) 신라 만노군(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게양마을) 치소 담밭안에서, 만노군 태수 김서현과 만명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칠성배문 김유신 장군은,
유년시절에 증조부(구형왕)의 한 많은 사연을 곱씹고자 11-12세 무렵에 이곳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와서 왕산자락에 있는 증조부 김구해왕(구형왕)의 묘를 돌보며 시묘살이 했고, 시묘살이 중간중간에 활을 쏘며 증조부의 망한을 달랬다.
▲ 김유신 장군 사대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김유신장군이 5년간이나 증조부 구형왕의 묘를 돌보며 때때로 활쏘기를 했던 곳.
한편 김구해왕의 서거 후 패망한 왕자 김무력이 신라로 투항하자 신라에선 진평왕과 사도태후 사이에 난 아양공주를 김무력에 시집보내는데,
이는 겉으론 패망한 가야국의 왕자를 융숭히 대접하는 요식행위 일뿐 실제로 김무력은 경주의 신라 핵심귀족세력으로부터 심한 비토와 견제를 당했다.
이에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은 일부러 변방군역을 자처하여 한강유역 신주의 군주로 있으면서 몰래 야망을 키우고 힘을 비축하던 중, 554년 저 유명한 관산성(현 충북 옥천) 전투에서 첫 전투에서 신라군이 패했으나,
때를 노리던 김무력 장군은 성왕이 관산성 함락 후 태자 여창(훗날 위덕왕)을 위문하려 옥천읍 월전리에 있는 구천(狗川)에 이르자 휘하 부장인 고간과 도도를 매복시켜 성왕을 사로잡는 동시에 참수시켜 九天의 客으로 만들었다.
▲ 삼년산성(충북 보은) - 470년 자비왕때 3년에 걸쳐 완공.
이 성 출신의 도도가 성왕기습에 성공해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 성왕의 사절지 구진베루 (옥천읍 월전리)
성왕이 관산성 함락 후 태자 여창을 위문차 狗川에 이르자
김무력 휘하 고간과 도도에 의해 성왕이 사로 잡힌다.
▲ 동화총 벽화 (부여읍 능산리)
관산성 전투에 서태자 여창의 병문안을 가다 김무력의 매복군에 걸려
전사한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
▲ 창왕명 석조사리감 (능산리 절터)
백제창왕(위덕왕)13년(567)대세재정해매공주공양사리.
공주가 성왕의 위업을 기리고 명복을 빌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 관산성 전투의 대역전극으로 김유신장군의 조부이신 김무력 장군은 일거에 그 이름을 떨치고 동시에 신라 핵심귀족사회로부터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를 뒷받침 하듯이 <신라단양적성비> 넷째 줄에 김무력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올리고 훗날 <창녕순수비> 에도 수가인물(隨駕人物) 편에 오른다.
▲ 신라단양적성비
첫째 줄에 이사부(태종)가 나오고,
넷째 줄에 15세 풍월주 김유신 장군의 조부이신 김무력이 나온다.
▲ 창녕진흥왕 순수비 (경남창녕, 국보33호)
561년(진흥왕22)건립추정, 순수의 事跡과 수가인물(수駕人物)의 列記등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