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무대왕 김유신 이야기 (1편)



<제1편> 역사의 군웅으로서

 

흔히들 장수하는 나무들 가운데 으뜸으로 비유되는 주목(朱木)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고 하고, 카우리(Kauri) 소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 만년을 산다.’고 한다.

 

        ▲ 카우리 소나무

        뉴질랜드 와이포우아(waipoua)에 있는 숲의신(tane mahuta)이라

        불리는 거대한 소나무.

        살아서 천년, 죽어서 만년을 산다고 한다.

 

주목이나 카우리나무처럼, 우리의 역사에도 띄어난 인물 중에 당대의 삶은 짧았으나 사후에 갈수록 그 명성이 인구에 회자되고 만세에 그 이름이 길이 빛나는 영웅호걸들이 많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치우천황(자오지한웅), 을지문덕(우루치문디기), 연개소문(연나갓쉰동), 김유신, 흑지상지, 고선지, 이순신 등을 최고의 호걸로 생각하며, 다른 영웅호걸들은 차차 소개하기로 하고, 흥무대왕 큰큰소뿔한(太大角干) 김유신 호태 대장군을 먼저 소개한다.

 

             ▲ 신라태대각간순충장렬개국공흥무대왕 김유신 영정

                    (길상사흥무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김유신은 패망한 가야왕국의 후손으로 수많은 견제와 난관을 극복하고 살아서는 삼한일통의 원훈으로 태대각간으로 부귀와 권세를 누리다 와석종신했고, 죽어서는 신하의 몸으로 우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18세에 화랑의 총사령관인 15세 풍월주가 되었으나 몰락한 가야계의 후손으로 이후 줄곧 신라의 핵심귀족사회로부터 비토 되어 심한 견제를 받다가 50세에 이르러 상장군을 단 후 66세에 상대등, 만년 74세에 태대각간에 올랐으니 장군이야말로 대기만성의 전범이었다.

 

     ▲ 김유신의 증조부 구형왕릉(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532년 졸지에 신라를 뺏기고 돌아가신 비운의 조부 구형왕을 추모하며.

 

크고 작은 30여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전략가로서 멸사보국해 가정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했고,

 

662년 평양성 군량수송 작전 때는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맨 선봉에 서서 견마지로를 다했다.

 

        ▲ 김유신 장군 사대비(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김유신 장군이 5년여 간이나 증조부 구형왕의 묘를 돌보며

            때때로 활쏘기를 했던 곳.

 

673년 7월 1일 임종전 문무왕이 문병차 장군의 사가로 행차했을 때 김유신 장군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신이 온 힘을 다해 원수(元首)를 모시려 했으나 견마(犬馬)의 몸에 병이 들어 오늘 이후로 다시는 용안을 뵙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문무왕이 장군의 두 손을 꼭 잡고 울면서 말하길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 물이 있는 것과 같소.

 

만일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은 어떻게 하고 사직은 또 어떻게 하리까” 하니 이에 장군이 마지막 유훈을 문무왕에게 내리고 임종하시니 죽는 순간까지도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안녕을 갈구한 장군이야말로 죽어서도 3000년을 이 강토를 굽어보시리라.

                       

                        - 다음 편에 계속(to be continued) -

 

 

                     讚. 김유신가

 

                                     박만호 著

 

 

  살아서는 영일없이 전장에서 견마의 로(勞)를 다했고


  죽어서도 삼천년을 이 강토를 굽어 살펴 수호하시니


  아! 원훈(元勳)의 드높은 공은 천추에 길이 빛나리라